"우리, 내일 아침에는 일찍 나가는 게 어때. 출근 시간은 피해야 해." 내가 삼척 여행 두 번째 날의 일정을 이야기하자, 친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삼척도 출근 시간에는 차가 많이 막히는 편이야?" 내가 답했다. "당연하지. 여기도 엄연히 도시라고. 아침저녁으로 7번 국도가 얼마나 북적이는데." 친구는 그 말을 믿었고, 알람을 아침 6시에 맞추겠다고 이야기했다.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어수선을 떨다가 겨우 숙소를 나섰다. 러시아워 같은 건 없었고, 친구가 투덜거렸다. "교통체증은 무슨, 산속이구만." 7번 국도를 벗어나자, 도로는 좁아졌다. 길은 굽이굽이 산속으로 이어졌다. 점점 안개가 자욱해졌다. 전날 밤에 비가 많이 내린 탓이었다. 신선이 산다더니. 진짜 그렇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듯했다.
삼척에 이런 말이 있다. '환웅이 삼척에 왔다면 곰과 호랑이를 어느 동굴에 넣어야 할 것인지 엄청난 고민을 했을 것'이라고. 신기면 대이리의 동굴 지대, 환선굴이 있는 이 일대에는 무려 80여 곳 이상의 동굴이 있다. 환선굴과 대금굴, 관음굴 등이 그렇다. 환선굴은 동양에서 가장 큰 석회암 동굴이기까지 하다니.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동굴 중에는 얼마나 대단한 것들이 있을까.
환선굴은 10년 만이었다. 친구는 처음이란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모노레일이 놓였다. 가쁜 숨을 쉬며 올라갔던 10년 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친구에게 환선굴까지 오르려면 고생깨나 할 거라고 이야기했는데, 머쓱해지는 순간이었다. 친구는 모노레일을 보더니 환한 미소를 지었다.
걸어서는 30여 분이 걸렸을, 그것도 오르막길을 꼬박 올라서 가야 했을 길을, 이 모노레일을 이용하면 2분 만에 환선굴에 닿을 수 있었다. 경사각이 상당한 것을 보니, 누군가에게는 스릴 혹은 공포를 선사했을지도 모르겠다. 모노레일은 덜컹거리며 덕항산을 올랐다. 신선계로 조금씩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산을 뒤덮었던 안개는 환선굴 입구에서도 여전했다. 여기부터는 정말이지 인간 세계가 아닌 것만 같았다. 씩씩하게 들어서는 친구의 뒤를 따랐다. 안개는 동굴 특유의 높은 습도와 어우러지며 더욱더 짙어지고 있었다. 영화 '미스트'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한 치 앞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그나마 화려한 조명이 우리를 감싸고 있어 다행이었다. 탐방로 옆에 놓인 온도계는 섭씨 10도를 가리켰다.
퇴적과 침식 등 여러 작용(문송합니다...)으로 인해 독특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석회암 동굴이어서일까. 환선굴 곳곳에는 온통 앞서간 이들의 상상력으로 가득했다. 푹 패인 채 물이 흐르는 계곡은 용이 지나간 흔적이고, 부드러운 곡선미를 자랑하는 석순은 성모마리아 상이란다. 개중에는 관세음보살도 있었다. 거북이나 항아리도. 여기가 신선계인 이유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상상력 풍부한 선행자들이 우리에게 사랑을 맹세하라고 종용하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지옥으로 향하는 다리를 선보였다. 그다음이 '참회의 다리'라니. 맥락 없는 탐방로가 이어지는 게 조금은 재미있었고, 조금은 어이없었다. 참회의 다리를 지나니 내 죄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도 한다. 스토리 참 다이내믹하다.
친구가 물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해?" 나는 그에게 힘겹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신나게 앞장서더니, 벌써 지쳤어?" 오르막과 내리막은 거칠었고, 고개를 숙여야 하는 곳도 부지기수. 습도도 높고, 동굴 안쪽에는 산소도 부족했는지 지칠 법도 했다. 아니면 친구의 체력이 여기까지라서 그런 것일지도. 이정표에는 1km 지점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내가 이야기했다. "이제 반 지난 것 같아." 어째 친구의 어깨가 좀 더 처진 것 같았다.
다리도 몇 개 더 건넜고, 폭포도 만났다. 각종 조각상들을 감상하기도 했다. 광장에서는 춤을 추기도 했다. 아, 사실 미끄러진 것이기는 했다. 슬슬 바깥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의 다 온 것 같다며 친구를 다독이고 있는데, 녀석이 갑자기 놀라더니 뒤를 돌아보고 외쳤다. "저거, 뭐야?" 그가 가리킨 곳에는 마네킹 하나가 앉아 있었다. 머리를 다 풀어 헤친 노인이었다.
알고 보니 전설 속 인물이었던 것. 동굴 아래에 있는 마을을 찾은 한 승려가 도를 닦겠다며 산으로 떠났는데,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단다. 결국 걱정이 된 사람들이 승려를 찾아 나섰는데, 아무리 뒤져도 그 행방이 묘연했다고. 사람들은 그 사건을 두고 승려가 신선이 된 것이라고 믿었고, 환선굴이라는 이름 역시 그 설화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약간 신기하기는 했다. 3~4km나 걸은 것 같았는데 탐방로의 길이는 1.6km에 불과하질 않나. 두 시간쯤 흘렀다고 생각했는데 1시간도 채 지나지 않기도 했고.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자, 친구가 어제의 그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현실이었다.
/ 환선굴 /
- 위치: 강원 삼척시 신기면 환선로 800
- 전화번호: 033-541-9266
- 운영시간:3~10월 09:00~17:00 / 11~2월 09:30~16:00 / 매월 18일 휴관
- 관람요금: 어른 4,500원 / 청소년(13~18세) 3,000원 / 어린이(7~12세) 2,000원
- 모노레일 이용 요금: 어른 및 청소년(13세 이상) 왕복 7,000원, 편도 4,000원 / 어린이(7~12세) 왕복 3,000원, 편도 2,000원
* 내부 사진 촬영은 금지다. 이 포스팅에 사용된 사진은 관계 기관의 협조를 받아 촬영한 것들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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